살아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_신성은, 신은성 이른둥이 아빠의 이야기
다솜이가 만난 사람들/수기집<가족> 2012. 8. 8. 15:03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2006년 5월 24일 1,570g 1,260g으로 태어난 신성은, 신은성 아빠의 이야기
내 사랑 늦둥이들
우리 사랑하는 아이들 성은, 은성이를 만난 건 마흔이 넘어서였습니다. 남들이 말하는 늦둥이인 셈이죠. 첫 아이를 가진 적이 있지만, 아내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해 어쩔 수 없이 이별해야 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아기는 우리 부부에게 더욱 절실했어요. 아내와 저 모두 나이가 나이인지라 인공수정, 시험관아기…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한 뒤 드디어 임신이 됐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됐답니다. 처음엔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임신이 안 되면 입양까지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인공수정이 성공했다는 소식에 아내는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저도 당연히 기뻤지요.
“여보, 우리 해냈어요.”
“응, 수고했어. 앞으로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아기 생각만 해.”
교사였던 아내는 6개월까지는 직장생활을 하겠다고 했어요. 저는 아무 것도 몰랐던지라 그래도 되는가 싶었죠. 뱃속 아기가 쌍둥이인지라 일반 산모보다 배가 빨리 불러온다는 것쯤은 알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무섭게 배가 불러오는 걸 본 저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임신은 즐겁기만 했어요. 자주는 아니지만 전 뱃살이 틀까 싶어 마사지도 열심히 해주고 먹고 싶다는 걸 빠짐없이 사다 날랐지요. 유독 배가 무거워서였는지 아내는 자주 힘든 모습을 보였습니다. 옆에서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하루는 교회 바자회 행사 때문에 아침 일찍 집을 나와야 했습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여보, 저예요. 빨리 집에 오세요. 배가 아파요.”
아내는 고통스런 목소리로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여보, 무슨 일이야. 조금만 기다려, 얼른 갈게.”
가슴은 마구 쿵쾅거리며 뛰었습니다. 집으로 향하는 도중 머릿속으로는 몇 주인지 계산해봤으나 아무래도 나올 시기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험난한 과정
허겁지겁 집에 도착하니 아내는 배를 움켜잡고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여보, 빨리 병원에 가요. 하혈이 심해요.”
“알았어. 조금만 참아.”
전 바자회 하던 차림새 그대로 아내를 차에 태우고 평촌에 있는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병원에 도착하자 담당 주치의를 만나고서 초음파 검사를 하니 다행히 아이는 이상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주치의는 주의를 당부했습니다.
“27주라 조산의 우려가 있으니 각별히 주의하세요.”
“많이 안 좋은가요?”
“바로 입원수속 밟고 지연제를 맞은 뒤 지켜봅시다.”
쌍둥이이기에 더 조심했어야 하는데. 내가 진작 휴직하도록 했어야 하는데. 저는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무척 힘들었을 텐데 잘 참아준 아내가 대견하고 고마울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곧 걱정이 밀려왔습니다.
‘혹시 예정일 보다 빨리나오면 어쩌나…. 적지 않은 나이에, 초산에, 아직 아기들이 세상 구경 하려면 적어도 2개월은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저의 걱정은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진료시간이 되자 주치의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습니다.
“약이 듣질 않아요. 진전이 없어요. 하혈도 심하고 이대로 두었다가는 아이들도 위험합니다.”
무슨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제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바깥은 천둥번개로 소낙비가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주치의는 이곳저곳 대학병원으로 전화 하시더니 영동세브란스 병원을 소개했습니다.
“간호사! 구급차 대기시켜. 보호자분은 동행할 채비를 하세요.”
병원으로 가는 구급차 안에서 저는 아내를 안심시키기 위해 계속 말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 속에서는 계속 같은 말만 떠올랐습니다.
“주여! 제발 도와주세요.”
1시간여 지났을까 영동세브란스 응급실에 도착하자 담당간호사는 종합 진단을
해야 한다며 입원수속을 밟도록 했습니다. 아내는 겁에 질렸던지 안색이 좋지 않았습니다.
“여보. 괜찮을 거야. 힘내, 아무 걱정 하지마.”
검사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담당의사는 검사 결과 차트를 넘기며 각종 어려운 의료용어를 사용해 협박에 가까운 경고를 했습니다. 수많은 말을 했지만, 그저 이해할 수 있는 건 아기가 정상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최대한 노력은 해 보겠지만 각오는 하셔야 합니다. 산모도 장담 못 합니다,. 초산, 노산에다 현 상황으로 자연분만도 어렵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늦둥이 낳는데 뭐가 이리 어렵고 힘든지. 온갖 협박이란 협박은 다 듣고 너무 무서웠습니다.
아내는 잘 참아내고 있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흘러 1주일이 흘렀습니다. 또 한 번 저를 놀라게 하는 게 있었습니다. 중간 진료비청구서였습니다.중간 진료비청구서를 보는 순간 입이 다물어 지지 않았습니다. 쌍둥이를 갖기 위해 그동안 들어간 돈이 적은 돈도 아니었습니다. 아기만 가지면 엄마 뱃속에서 열 달 채워 자연적으로 건강한 아기가 세상 구경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던 저는 청구서를 보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 십, 백…으윽…사백만 원?’
저는 아내에게 한동안 얘기도 못하고 혼자 고민했습니다. 밑천이 그동안 거의 바닥난지라 카드 긁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원무과로 가서 상세 내역을 확인하고 사정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상세 내역은 모르는 용어들만 가득하고 비급여란의 금액들은 이해할 수 없는 숫자들로 가득 했습니다.
자궁수축제 한 병에 80만원. 어이가 없었습니다. 보험적용도 안되고 답답한 노릇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카드결제를 하기로 했습니다. 아내의 원만한 출산을 위해서라도 싸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혹시 알까 영수증과 청구서는 꼬깃꼬깃 접어 지갑 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해서 돌아와 보니 아내의 안색이 좋지 않았습니다.
“여보 괜찮아? 왜 그래?”
“낮부터 진통이 오더니만 더 아파요.”
아내는 얼굴이 하얗게 상기된 채 겁에 질린 모습이었습니다. 간호사를 불러 어떻게 좀 해보자고 하니 억제제를 맞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면서 진통정도를 검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기의 심장은 두 녀석 모두 정상적으로 뛰고 있었으나 아내의 진통 주기는 더욱 짧아 졌습니다. 자정이 되어 같은 병실의 산모들은 모두 잠들고 적막이 흘렀습니다. 저 역시 피곤한지라 아내를 재우고 병실 한쪽의 보호자 침낭에 잠을 청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간호사가 문을 열고 황급하게 들어오더니 저를 불렀습니다. 아기가 나오려는 것이었습니다. 30주 2일. 분만실의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은 자정을 넘어 1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어느덧 지났을까. 핸드폰이 울렸습니다.
“보호자님, 지금 바로 수술실 앞으로 오시죠.”
저는 황급히 수술실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간호사의 품에는 핏기도 채 가시지 않은 아주 작은 아기가 안겨져 있었습니다. 간호사는 다급한 목소리로 병원에 인큐베이터가 모자라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먼저 태어난 큰 아이였습니다.
서울역 인근에 있는 아동병원으로 옮긴다고 했습니다. 저는 걱정이 밀려왔습니다. 한시간이나 걸리는 그곳까지 가는 도중에 무슨 일이나 일어나지 않을지 두려웠습니다.구급차는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올림픽대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아기의 작은 입엔 산소마스크가 씌어져 있고 가슴에는 아기의 상태를 체크하기 위한 의료장비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습니다. 저는 큰 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빠르게 뛰는 맥박은 저의 마음을 더 조이게 하였습니다. 머릿속에는 뒤이어 태어날 작은아이와 눈앞에 있는 큰 아이로 혼란스러웠습니다. 돌아오는 길, 구급차 안에서 간호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혹시 큰아이 별일 없겠죠?”
“글쎄 너무 미숙아라 현재로서는 아무 말씀 못 드리겠네요.”
“몇 킬로그램으로 태어났어요?”
“1.57킬로그램이요. 이거는 아기 발도장이에요. 기념으로 보관하세요.”
선생님의 손에는 성은이의 발도장과 손도장이 찍힌 카드가 있었습니다. 마음이얼마나 찡 하던 지요. 발도 크고 손도 크고 각각 다섯 개의 손가락과 발가락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달리는 차창 밖을 보며 서울의 야경을 보니 아침이 밝아오고있었습니다.
다행히 아내도 작은 아이도 다 무사했습니다. 작은 아이는 1.23kg이었습니다. 아침이 되어 신생아실에 있는 작은 아이 은성이를 보기위해 조용히 문을 열었습니다. 신생아들 여럿 가운데 한 모퉁이에 산소마스크와 가냘픈 손등에 주사바늘이 놓인 채 숨을 헐떡이고 있는 어린 생명이 보였습니다. 은성이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제 아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너무 작아 손을 대기도 두려웠습니다. 엄마 배속에 1분이라도 더 있었기 때문일까요? 언니와는 다르게 생기 있어 보였습니다. 저는 은성이를 카메라에 담고 신생아실을 나섰습니다. 아내는 카메라속의 성은이와 은성이를 보자 가엽던지 슬피 울기 시작했습니다.
“여보 괜찮아, 울지 마.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데 감사해야지. 둘 다 건강하게 예쁘게 자랄 거야.”
아내를 토닥이며 진정시켰습니다. 하지만 저도 어린 두 생명을 보고서는 얼마나 목이 메던지요. 그나마 다행인 게 30주2일만에 태어났어도 두 녀석 모두 눈은 초롱초롱 했습니다.
이제 함께 헤쳐 나가자
저는 큰 아이 성은이가 있는 병원을 찾았습니다.
“선생님, 저희 아기 어떻습니까?”
“아직 미숙아라 뭐라고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먼저 폐의 기능이 정상 아이들보다 많이 떨어집니다. 지켜보면서 필요시에는 폐 계면활성제를 맞아야 합니다.”
“숨은 잘 쉽니까?”
“현재로써는 산소호흡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계면활성제는 가격도 비쌉니다. 의료보험 적용여부도 확실치 않고요. 필요하다면 2,3회까지 투여해야 합니다.”
“얼마죠?”
“1회 투여 하는데 80만원까지 합니다.”
“의료보험 적용 안 되나요?”
“아기의 상태에 따라 적용여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아직 두고 봐야 합니다.”
저는 아이도 걱정 되었지만 바닥난 가계도 걱정되었습니다. 작은 아이 담당 선생님께도 같은 내용을 들은지라 불어나는 병원비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습니다. 우리 사회의 저출산에 대한 심각성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남의 일인 줄로만 알았던 저였기에 막상 나에게 닥치니 우리나라 부부들의 아기 낳지 않으려는 심정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이 하나 낳기 위해 들어가는 돈이며, 낳는다 해도 기르는데 들어가는 돈은 일반 직장인 1인이 벌어서는 충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 역시 아이를 갖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어렵게 낳았지만 나라에서 지원해 주는 정책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산모도우미를 지원받기 위해서는 조건도 까다로웠습니다. 최저생계비 대상, 셋째 아이부터 지원되는 정책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많지 않은 전세금을 담보로 하고 이사하기로 결심 했습니다. 아내와 출산 전에 이야기는 하였으나 막상 아내와 두 어린생명을 병원에 두고 이사를 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이사 당일 아내는 대전의 처남댁에 내려가 몸조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지만 걱정도 되었습니다. 아이들이태어난 지 3일 되던 날, 큰 아이를 데려가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원무과에 들러 퇴원수속을 하는데 의료비 청구서를 보고 놀라고 말았습니다. 내역인즉, 폐계면활성제 2회 투여에 초음파촬영, 영양제, 기타 입원에 따른 비용이 3일 만에 3백7십여만 원이나온 것이었습니다.
“저, 상세 내역 좀 뽑아 주시겠어요? 엊그제 담당간호사 말로는 1회 투여하는데 80여만 원 정도 한다던데 120만원이 어떻게 된 겁니까? 그리고 남들은 보험적용 사례도 있다던데 왜 보험은 안 되나요?”
“글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담당 선생님께 여쭤 보시죠. 그리고 보험 적용여부는 저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보험공단 심사원들이 하는 겁니다. 현재는 집행할뿐입니다.”
원무과 직원은 약정을 보여주더니만 설명하기 시작 했습니다. 하지만 설명한들 제가 이해하겠습니까? 모르는 의료용어들로 환자의 편의를 위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던 거죠. 관할 건강보험공단에 진정서를 내기로 결심하고 실랑이를 뒤로 한 채 큰 아이를 인큐베이터에 옮겼습니다. 태양은 내리쬐고 서울의 교통체증은 그날따라 유난히도 심했습니다. 아직 완전하지도 않은 어린 생명을 고생시키는 게 가슴 아팠습니다.
구급차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교통체증은 저의 가슴을 더욱 조여 왔고 한강다리를 건너는 순간 참고 참았던 눈물이 울컥 쏟아졌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성은이, 은성이는 뇌병변장애 1급입니다. 장애가 있을 거라고는 짐작은 했으나 1급까지 받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아내의 놀란 표정이 떠오릅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 어떤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마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여보, 우리 그냥 감사하게 받아들이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선물이잖아. 우리 아이보다 더 어려운 아이들도 있잖아”라고 했지만 아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사실 나의 말이 귀에 들어 올 리없었을 것입니다. 어느 부모라도 자식이 평생 장애로 살아간다면 가슴 안 아플 부모는 없을 테니까요.
저 역시 장애 3급으로 45년 인생을 살아온지라 항상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신념으로 제 자신과 싸우며 살아 왔습니다. 남들 두세 배 더 노력해서 꼭 성공 할 것이라는 마음으로 살아왔기에 현재의 내가 있지 않나 봅니다.
성은이, 은성이 나이 현재 다섯 살. 성은이는 아직 혼자서 방바닥에 앉질 않습니다. 은성이는 앉고 기어 다니기는 하지만 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좀 더 늦게 일어나라고 하는가 봅니다.
오늘은 성은이와 은성이가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다리 수술을 하기 위해 입원하는 날입니다. 인천 글로리 병원에서 두 아이를 데리고 고생 할 아내를 생각 하면 저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은성이와 전화 통화 내용입니다.
“아빠, 성은이 언니 다리수술하고 저는요, 보톡스 맞으러 신촌 세브란스병원 가는데 아빠 회사일 바쁘셔서 못 오시죠?
아빠 저는 이해해요.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바쁘시니까 올 수 없잖아요.”
“은성아, 아빠 이해 하니? 고맙다. 아빠가 바쁜 일 마치면 꼭 은성이한데 갈게. 은성이 너무 착하구나. 언니 좀 바꿔 줄래?”
은성이의 따듯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찡하면서 눈물이 흐릅니다. 성은이의 전화 통화 내용입니다.
“아빠, 모해요?”
“ 뭐라구?” “뭐라구!” “뭐라구.”
찰칵. 전화가 끊어졌습니다.
성은이는 은성이와 달리 장애가 심하다 보니 발달이 더 늦습니다. 언어 또한 발음이 부정확해서 의사 전달이 어렵습니다. 그래서인지 성은이를 강하게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은 성은이, 은성이가 수술하는 날입니다. 팔과 다리 어디 성한 곳 없이 주사바늘 자욱이 엄마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성은아, 괜찮아? 아프지 않니?”
성은이는 엄마를 보더니만 더 크게 울어댑니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아팠을까요?
“엄마, 은성이 어디 있어요?”
언니 성은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동생 은성이가 걱정되었나 봅니다.
“성은아, 은성이도 곳 수술할 거야. 걱정하지 말구, 성은이가 은성이 걱정되는가보구나.”
은성이도 수술 마치고 ‘회복중’이라는 전광판에 이름 석 자가 뚜렷이 보이고 얼마되지 않아 수술실 문에서 은성이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은성아 괜찮아?”
“네, 아버님.”
은성이는 어렸을 적부터 저에게 아버님이란 존칭을 씁니다.
“은성이는 울지도 않고 착하구나. 은성아, 언니가 은성이 걱정 하면서 어디 있냐고 찾더라.”
“아버님, 저도 언니 보고 싶어요.”
“그래 얼른 언니한테 가자.”
성은이는 엄마 곁에서 곤히 잠들고 있었습니다. 은성이도 언니 옆에 누워 잠이 듭니다. 병원을 나서면서 생각 했습니다.
“꼭 해낼 거라고. 성은이와 은성이는 꼭 해낼 거라고. 남들보다 두세 배 노력해서 더 강하게 키우겠노라고.”
나는 살아 있습니다.
아이들도 살아 있습니다.
아내도 살아 있습니다.
모두 살아있는 것에 감사합니다.
그냥 불편할 따릅니다.
이렇게 생각 하니 마음이 행복해 집니다.
2006년 5월, 1.57kg, 1.26kg로 세상을 노크한 성은, 은성이는 신찬선 씨의 사랑스런 늦둥이들입니다.
하지만 예정일을 한참이나 남긴 30주에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너무 일찍 태어나 한참동안 인큐베이터에서 집중 치료를 받아야 했던 성은, 은성이. 두 아이는 현재 뇌병변장애 1급 진단이 내려진 상태입니다. 그나마 언니 성은이보다 동생 은성이는 건강 상태가 조금 나은 편입니다.
성은이는 목을 가누지 못하고 혼자 앉을 수 없는 반면 은성이는 혼자 앉고 기는 등 몸놀림이 더 자유롭습니다.
성은, 은성이는 2008년부터 계속 입원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계속 통원치료를 받았지만, 성은이와 은성이의 상태가 입원하여 치료를 받는 게 낫겠다 싶어 결정한 것입니다. 손, 발이 자유롭지 못한 성은, 은성이는 며칠 전에 신경절제 수술을 받았습니다. 엄마 이명실 씨에 의하면 수술이후에 훨씬 손, 발놀림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연일 계속되는 야근으로 지친 아빠 신찬선 씨도 아주 조금씩이나마 좋아지는 딸들의 모습에 다시 한 번 힘을 내 봅니다.
* 위 글은 다솜이작은숨결살리기 <가족>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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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보산 다솜이작은숨결살리기│김진아 간사 함께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낙천주의자. 존 레넌의 연인이자, 전위예술가인 오노요코의 "혼자만 꾸는 꿈은 꿈일 뿐이며,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란 말을 좋아합니다. 이른둥이를 지원하는 다솜이작은숨결살리기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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